오시미 슈조 작품을 처음 접한 건 악의 꽃을 도서관에서 우연히 집어 들었던 날이었습니다.
만화를 펼치자마자 그 독특한 필치와 분위기에 묶여버렸고, 결국 나머지 권을 빌리러 세 번을 더 오게 됐습니다.
그 이후로 해피니스, 피의 흔적, 눈깜빡임 소리까지 차례로 쫓아 읽게 됐습니다.
이 글은 그렇게 쌓인 독서 기록과 감상을 정리했습니다.
결말이나 전개 등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으니, 이를 미리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오시미 슈조는 어떤 만화가인가

사진 출처 (visla)
오시미 슈조는 1981년 군마현 출신의 일본 만화가입니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별책 소년 매거진 창간호부터 연재한 악의 꽃으로 일본 내에서 큰 인지도를 얻었습니다.
이후 해피니스, 나는 마리 안에, 피의 흔적 등 장편만화를 연이어 발표하며 독보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했죠.
그의 작품을 관통하는 공통 주제는 고립입니다.
개인이 사회나 가족으로부터 어떻게 고립되고, 그 고립이 어떻게 인간을 변형시키는가를 반복해서 탐구합니다.
사춘기의 자의식, 소통의 단절, 지배와 종속 관계가 각 작품마다 다른 형태로 반복됩니다.
‘작품이 지날수록 자신의 내장을 꺼내보여주는 만화를 그리고 있다’는 독자들의 평가를 받기도 하죠.
초창기에 비하면, 점차 픽션과 자전의 경계를 허무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악의꽃 – 소년의 껍질을 깨는 이야기

사진 출처 (extmovie)
악의꽃은 보들레르의 시집 이름을 그대로 빌려온 작품입니다.
이 만화는 문학소년 카스가 다카오가 짝사랑하던 여학생의 체육복을 충동적으로 훔치면서 시작됩니다.
이 행위가 반의 문제아 나카무라 사와에게 발각되고, 나카무라는 이 비밀을 매개로 카스가와 기묘한 계약을 맺습니다.
초반부는 불안과 죄책감을 정밀하게 포착한 심리 묘사가 압권입니다.
카스가의 내면에는 사에키를 이상화하면서도 나카무라에게 이끌리는 감정, 도덕적 구속과 일탈 욕구가 뒤엉켜 있습니다.
나카무라는 그런 카스가의 내면을 날카롭게 꿰뚫어보는 존재로, 작품 내내 불편한 거울처럼 비춰봅니다.
작품의 표현 방식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인물의 움직임과 감정선이 비정상적으로 섬세하며, 컷과 컷 사이 여백에서 느껴지는 불쾌감에서 작가의 개성이 드러나죠.
악의 꽃 결말 – 카스가는 결국 어디로 갔는가
악의 꽃 결말은 긴 시간을 뛰어넘어 어른이 된 카스가로 마무리됩니다.
작중 중반 이후 배경이 현재에서 몇 년 뒤로 이동하고, 카스가는 나카무라와의 관계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아갑니다.
토키와라는 여성과 관계를 맺으면서 카스가의 어두운 자아는 점차 옅어집니다.
악의 꽃은 일상적인 배경에서 감정의 파국을 섬세하게 포착한 연출로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결말에서 카스가는 망가진 자신의 과거를 직시하고 새 삶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방향으로 이야기가 완성됩니다.
나카무라가 결말 직전에 등장하는 장면은 작품 전체의 감정적 무게를 한꺼번에 압축해 줬습니다.
오시미 슈조 피의 흔적 – 독친을 정면으로 바라보다

사진 출처 (11st)
오시미 슈조 피의 흔적은 그의 대표작 중 하나로, 스스로의 모친 관계를 기반으로 그린 작품이라는 것이 팬들 사이의 정설입니다.
주인공 세이이치와 그의 어머니 세이코의 관계를 중심으로 전개되며 일본에서 ‘독친(毒親)’이라 불리는 부모의 문제를 다룹니다.
어머니 세이코는 아들 세이이치에게 극도로 과잉 헌신하면서 동시에 억압합니다.
사랑과 지배가 분리되지 않는 그 관계는 페이지를 넘길수록 조여드는 느낌을 줍니다.
박인하 평론가는 피의 흔적을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과 같은 사소설의 계보에 놓았습니다.
사춘기 소년의 고통, 고독, 소통의 부재, 지배와 피지배 관계가 현란한 필치로 묘사되어 있다고 평가한 것이죠.
사랑과 공허가 뒤엉킨 어머니의 표정

사진 출처 (reddit)
피의 흔적을 읽으면서 가장 불편했던 장면은 세이코의 표정입니다.
극도로 다정한 얼굴과 공허한 눈이 동시에 존재하는 그 모순이,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두려움을 유발합니다.
제가 보기에, 오시미 슈조의 그림은 얼굴로 말을 하는 것 같습니다.
캐릭터의 대사보다 눈의 방향, 입꼬리의 미세한 떨림이 글보다 더 많은 것을 전달합니다.
오시미 슈조 해피니스 – 흡혈귀라는 형식으로 그린 각성

사진 출처 (kyobobook)
오시미 슈조 해피니스는 흡혈귀물이라는 장르 형식을 취하면서도 그 안에 청소년의 자아 각성과 정체성 혼란을 담은 작품입니다.
평범한 고등학생 오카자키는 밤에 정체불명의 소녀에게 습격당해 흡혈귀가 됩니다.
이후 그의 감각이 변하고, 세계를 보는 방식이 달라집니다.
특히 흡혈귀의 시야로 보이는 세계를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을 연상시키는 선묘화로 표현한 부분이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해피니스는 고어한 묘사와 현실적 전개로 대중적 인기는 얻지 못했지만, 오시미 슈조 팬들 사이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저 역시 처음에는 흡혈귀라는 설정이 다소 의아했습니다.
하지만 읽어나가면서 이 형식이 오시미의 주제의식과 얼마나 잘 맞아떨어지는지를 체감했습니다.
오카자키가 인간도 흡혈귀도 아닌 경계에서 선택을 내리는 결말은,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사람이라면 공감할 만한 장면이었습니다.
오시미 슈조 인터뷰 – 작가가 직접 말하는 창작의 기원
오시미 슈조 인터뷰는 작품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여러 개 제공합니다.
시이나 우미와의 특별 대담에서 오시미는 자신이 보들레르의 악의 꽃과 같은 시집을 15세 무렵에 접했다는 사실을 밝혔습니다.
같은 인터뷰에서 오시미는 하야시 세이이치 선생님을 영향을 받은 만화가로 언급했습니다.
기괴하고 불안정한 인물 표현이 두드러지는 하야시의 화풍은 오시미 만화의 독특한 분위기와 연결되기도 합니다.
이나코 작가와의 대담에서는 “더 이상은 논픽션밖에 그릴 수 없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픽션의 형태를 빌리면서도 자신의 내부를 꺼내 놓는 것이 자신에게 남은 유일한 창작 방식이라는 고백으로 읽히기도 합니다.
오시미 슈조 엄마 – 작품 전반을 관통하는 모성의 그림자

사진 출처 (ruliweb)
오시미 슈조 엄마에 대한 이야기는 작품 곳곳에서 변형된 형태로 반복됩니다.
피의 흔적의 세이코가 그 가장 직접적이긴 하지만, 악의 꽃에서도 카스가의 내면 붕괴를 방치하는 가족의 부재가 나타납니다.
이는 모성의 실패를 암시하는 구도이기도 합니다.
작가에 따르면, 15세 시절 첫 여자친구에 대해 모친이 심하게 반대한 사건이 자신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고 합니다.
그 이후 자신의 마음이 죽었다고 표현할 정도였고, 말을 더듬게 되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이 상처가 이후 작품 전체에 걸쳐 모성의 지배와 압박이라는 주제로 반복 소환되는 거라고 해석됩니다.
글을 마치며
영상 출처 (sidebcorp)
오시미 슈조 만화는 편하게 읽히지 않습니다.
불편하고, 때로는 숨이 막히고, 어떤 장면에서는 페이지를 덮고 싶어지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계속 읽게 되는 이유는 그 불편함이 공허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물들의 고통이 현실과 연결되고, 그 연결이 독자 자신의 어딘가를 건드립니다.
저는 악의 꽃으로 입문한 뒤 해피니스, 피의 흔적 순서로 읽는 것을 권합니다.
세 작품을 읽고 나면 오시미가 같은 주제를 얼마나 다양한 형식으로 탐색하고 있는지 느낄 수 있습니다.
언젠가 그 탐색이 단순한 창작이 아니라 일종의 생존 방식에 가깝다는 인상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